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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7(월) 15:09
5·18 39주년, 진실 규명 위해 풀어야 할 과제는?

집단 발포 명령자·지휘 체계 이원화·암매장 등
전두환 '5·18 총사령관'으로 규정, 행적 밝혀야
핵심의혹 밝힌 국가보고서로 바른 역사교육을

남도투데이 namdo2030@naver.com
2019년 05월 13일(월) 16:55
13일 5·18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출범해야 하는 '5·18 진상조사위원회'는 한국당의 뒷짐으로 8개월째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진상조사위가 밝혀야 할 과제는 5·18 집단발포 경위, 최초 발포 명령자, 지휘체계 이원화, 헬기 기관총 사격·암매장의 실체, 군 자료 은폐·왜곡 경위, 1980년 5월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민간인 사망·상해·실종 등이다.
5·18의 가장 큰 과제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집단발포 명령의 전모를 밝혀 발포 명령자에게 공식 사과를 받는 것이다.
5·18 항쟁 기간 최초 발포는 1980년 5월19일 오후 4시 50분께 광주고 앞 도로에서 이뤄졌다.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김영찬(당시 조대부고 3학년)씨가 중상을 입었으나 수술 끝에 목숨을 건졌다.
첫 집단발포는 5월20일 오후 11시께 광주역 앞에서 자행됐다.
3공수여단 군인들은 당시 '16대대 운전병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역사를 뒤편으로 하고 일렬로 도열한 채 사격했다.
시민 5명(김재화·이북일·김만두·김재수·허봉)이 숨졌고, 부상자는 최소 11명이 넘었다.
11공수여단은 다음 날인 5월21일 오후 1시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에서 집회를 열던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순간 집단 발포했다.
계엄군은 당시 비무장 상태의 시민에게 조준 사격을 했다. 최소 시민 54명 이상이 숨지는 등 55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후에도 계엄군은 5월27일 전남도청 최후 진압 작전 등으로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포 명령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1988년~1989년 국회 청문회(광주특위), 1995년 12·12 및 5·18 검찰 수사, 1997년 대법원 판결, 2005~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017년 5·18 헬기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특조위 조사 등이 진행됐지만 끝내 발포 명령자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5·18 당시 신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 투입에 개입하지 않았다' '발포 명령이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옛 도청 앞 발포 이후인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30분께 시민들의 무장이 최초로 이뤄졌다'는 각종 기록(전남경찰청 보고서 등)이 나왔지만, 신군부는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이뤄졌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발포 명령에 대한 혼선은 지휘체계의 이원화와 연결돼 있다.
공식적인 지휘체계(형식상 계엄사령부-2군사령부-전투교육사령부-31사단-3·7·11공수여단)와 달리, '보안·특전사령관 전두환·정호용'으로 이어지는 별도 지휘체계에 따라 부대가 운용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20일과 21일 광주역과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발생했지만, 3공수여단장과 11공수여단장은 상급자인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사법당국은 1997년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공수부대 증파 결정·전교사령관 교체 등 중요한 결정에 직접 관여하고 수시로 3개 공수여단장들과 진압 대책을 논의하며 작전 지휘에 개입했다고 인정했다.
1980년 5월24일 광주 송암동과 호남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서 계엄군끼리 '오인사격'에 의한 군인들의 대량 희생 등도 지휘체계의 이원화에서 비롯된 사례들로 꼽힌다.
행방불명자와 이들의 암매장 여부도 오리무중이다.
5·18재단이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부지, 서구 치평동 옛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인근, 옛 화순 너릿재터널 주변에서 암매장 발굴·조사를 진행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헬기 기총 소사 또한 전일빌딩 탄흔 발견과 특조위 조사로 국방부가 공식 인정했지만, 실제 조종사와 사격 장소·목적 등이 규명되지 않았다.
정권 찬탈용으로 시국 수습 방안을 기획·설계해 공작을 펼친 전두환씨와 보안사, 편의대의 행적도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편의대는 무력 진압과 정권 찬탈의 명목을 확보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지속적으로 흘렸다.
군 비밀 조직의 5·18 관련 자료 왜곡·은폐 경위, 신군부와 미국의 관계, 대검 양민 학살, 시외곽 양민 학살,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 조작, 5·18 항쟁에 참여한 여성들의 인권 유린 실체, 5·18 사상자·행방불명자 수, 역사 왜곡 배후 세력 등도 밝혀야 할 과제로 꼽힌다.
핵심 과제를 밝히지 못한 배경은 ▲과거 청산 의지 부족 ▲신군부 핵심 세력에 대한 미흡한 처벌 ▲대법원 판결 시 학살의 주체를 계엄군으로 집단화 ▲군 기록 은폐·왜곡 ▲정치쟁점화 ▲국방부·검찰 등 국가기관 조사 때 진상규명 대상 한정 ▲광주학살의 총책임자인 전두환의 책임 회피 ▲거짓 정보 흘린 신군부 공작 경위 조사 미흡 등으로 요악된다.
지난해 전두환씨가 옛 전남도청 재진압 작전 결정회의에 두 차례 참석해 사실상 작전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는 군 기록물이 공개됐고, 최근엔 전씨가 광주비행장에 다녀간 직후 첫 집단발포가 이뤄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앞서 국방부 과거사위가 기무사에서 찾은 육군 제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전(全) 각하(閣下) : 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는 점도 사실상 전씨가 자위권 발동 명목으로 발포 지시를 내렸다는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진상조사위가 전두환씨를 '5·18 총사령관'으로 규정, 5·18의 실체를 밝혀 국가보고서에 기록하고 이행기 정의(군사독재정권-민주정부)를 바로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송선태 전 국방부 특조위 조사관은 "39년이 지나 중요한 증인들이 숨졌고, 군 기록물도 대부분 은폐됐다. 이번이 진상 조사의 마지막 기회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5·18의 진실을 밝혀 '올바른 역사'로 남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조사위는 광주 항쟁의 정점에 있는 전두환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시킬 책무가 있다.
처벌보다는 진실 규명과 화해에 초점을 맞춰 양심 선언과 제보를 이끌어야 한다. 핵심 의혹을 규명해 역사 왜곡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만석기자
남도투데이 namdo2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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